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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을미사변, 고종황제, 역사교육)

roiree11 2026. 3. 24. 11:08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을미사변, 고종황제, 역사교육)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을미사변, 고종황제, 역사교육)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부모라면 한 번쯤 고민해보셨을 겁니다. 아이가 역사책을 펼쳐놓고 "엄마, 아빠, 왕이 도망갔다는데 이게 맞아요?"라고 물을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저도 얼마 전 아이와 조선 말기 역사를 공부하다가 바로 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과 이후 대한제국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왜 혼란에 빠졌을까

19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를 이해하려면 청일전쟁(淸日戰爭)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1894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을 두고 벌인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는데, 당시 청나라 군대의 포탄이 콩가루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청나라는 내부 부패가 심각했습니다. 여기서 '방산비리(防産非理)'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방산비리란 국방 관련 물품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를 뜻하는데, 청나라는 이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던 것입니다.

일본은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를 차지하려 했지만,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개입하며 일본에게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국간섭(三國干涉)입니다. 삼국간섭이란 세 나라가 공동으로 특정 국가의 행동을 제지하는 외교적 압박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굴욕을 느끼며 요동반도를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 내 정치 세력도 요동쳤습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가 약해진 것을 보고 친러파(親露派) 인사들로 내각을 채웠습니다. 친러파란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맺으려는 정치 세력을 말하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상황이었죠. 결국 일본은 1895년 을미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습니다.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이 보는 앞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이 사건은 당시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아관파천, 왕이 도망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아이에게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가장 고민이 많았습니다. 고종은 1896년 1월,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것이 아관파천입니다. 아관파천이란 러시아 공사관(俄館)으로 피신(播遷)했다는 뜻으로, 조선의 왕이 자국 궁궐을 떠나 외국 공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왕이 없는 동안 조선은 열강의 이권 침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산림 채벌권을,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미국은 전기 사업권을 가져갔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만약 대통령이 전쟁 중에 다른 나라로 도망갔다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라고 되물었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아관파천의 핵심 문제였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의 좁은 방에서 1년을 보낸 뒤 1897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뒤 한 일은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습니다. 바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것입니다.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나 공화제(共和制) 같은 근대적 정치 체제로 나아가는 대신,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후퇴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입헌군주제란 왕이 있되 헌법에 따라 권력이 제한되는 정치 체제를 말하며, 당시 일본이나 영국이 이미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그 의미와 한계는

1897년 10월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환구단이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전통적으로 중국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시설입니다. 고종은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출범한 나라가 대한제국(大韓帝國)입니다.

솔직히 저는 고종의 노력 자체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라는 헌법을 발표했고, 지계(地契) 제도를 도입해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하려 했습니다. 지계란 오늘날의 등기부등본과 같은 개념으로, 국가가 토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증명해주는 문서입니다. 또한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했으며, 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독도를 울릉군의 부속 도서로 명시한 칙령 제41호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하지만 문제는 인사(人事)였습니다. 고종은 이완용 같은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했고, 이들은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그것을 실행할 사람들이 부패하고 무능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험상, 아이에게 역사를 설명할 때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실패했다"는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한제국의 개혁 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대한국국제 발표 - 황제 중심의 근대적 헌법 체계 마련
  2. 지계 제도 도입 - 토지 소유권의 명확한 등기 체계 구축
  3. 근대식 학교 설립 및 유학생 파견 - 교육 개혁 추진
  4. 영토 정리 - 북간도 편입, 독도 명시(칙령 제41호)
  5. 철도 및 통신 사업 추진 - 근대적 인프라 구축 시도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은 친일 관료들의 부패와 열강의 간섭 속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안 나오는 친구 같다"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노력과 결과는 별개라는 것, 그리고 리더십이란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교훈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제게 "그럼 고종은 나쁜 왕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나쁜 왕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읽지 못한 왕"이라고 답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은 분명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고,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하면 백성을 두고 도망간 선택은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황제로 즉위한 것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근대적 정치 체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한 결정이었습니다. 역사 속 인물을 평가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리더는 위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개혁은 어떻게 추진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DWZZcy0FrA&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