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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애민정치 (통공정책, 화성경영, 상언격쟁)

roiree11 2026. 3. 19. 16:19

정조의 애민정치 (통공정책, 화성경영, 상언격쟁)
정조의 애민정치 (통공정책, 화성경영, 상언격쟁)

 

정조 재위 중 실시한 신해통공으로 백성 3,500건의 억울함이 3일 만에 해결됐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저도 수원화성을 아이와 함께 돌아보며 이 숫자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꾼 결과였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정조가 펼친 정책들은 오늘날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통공정책, 백성의 경제를 열다

조선시대 상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고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과, 무허가로 장사하던 난전 상인입니다. 시전 상인들은 세금을 바치는 대신 주요 상권의 전포를 얻고 판매 독점권인 금난전권까지 보장받았습니다. 반면 난전 상인은 세금이 없어 같은 물건을 훨씬 저렴하게 팔 수 있었죠. 부자 농민들이 늘어나며 수요가 급증하자 백성들은 당연히 값싼 난전을 찾았습니다.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단속을 요구했고, 금난전권이라는 완장을 받아 난전을 직접 단속했습니다. 물건만 깨는 게 아니라 사람까지 때리는 일이 빈번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이 모습을 보고 "관이 민을 탄압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생필품 여섯 가지를 파는 기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해통공, 즉 통공정책입니다(출처: 문화재청).

저도 수원화성을 돌며 가이드에게 들었는데, 통공정책 이후 일반 백성들이 집에서 만든 물건을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됐다고 합니다. 누구나 장사할 수 있다는 것, 쉽게 말해 경제적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 셈이었습니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 정책이 기존 상권 질서를 흔들어 혼란을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장기적으로 백성의 삶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화성경영, 이상사회를 향한 실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뒤, 이곳에 반경 6km의 성을 쌓았습니다. 화성은 단순한 별장이 아니었습니다. 성 안에는 논과 밭, 뽕나무와 과일나무가 있었고, 시장과 행궁, 군사 숙소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하나의 작은 나라이자 대동사회를 실험하는 모델 하우스였던 셈입니다.

화성 축조 과정에서 정조는 거의 최초로 노동자를 고용해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요역이라 하여 백성을 강제로 동원했는데, 정조는 돈을 주고 인력을 썼습니다. 일하겠다고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정약용이 서양 과학 서적을 참고해 고안한 거중기(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계)도 여기서 활약했습니다. 거중기는 도르래 원리를 응용한 일종의 크레인으로,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화성 축조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임진왜란 이후 대포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높이 쌓지 않고 단단하게 축조했습니다.
  2. 옹성 구조로 외벽이 무너져도 내부 벽이 방어할 수 있도록 이중 구조를 갖췄습니다.
  3. 성 안에 논밭과 시장을 두어 자급자족 가능한 도시로 설계했습니다.

저도 수원화성을 직접 걸으며 성벽 곳곳에 총이나 포를 꽂을 수 있는 거치대가 있는 걸 봤는데,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백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정조는 1804년 어머니가 70세,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상언격쟁, 백성과 직접 소통하다

정조는 백성의 억울함을 듣기 위해 상언격쟁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상언격쟁이란 왕이 지나갈 때 백성이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가마를 멈추게 하고, 억울한 사연을 글로 올리거나 말로 호소하는 제도입니다. 영조 때 신문고를 부활시키면서 오히려 상언격쟁을 금지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신문고는 상징적인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신문고를 치려면 먼저 지방 관찰사, 그다음 사헌부를 거쳐야 했고, 궁궐 근처까지 가야 했습니다. 일반 백성이 접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죠. 반면 상언격쟁은 왕이 행차할 때 길에서 바로 민원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정조는 "백성이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했고, 실제로 수원 행차 중 백성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무엇이 억울하냐, 무엇이 아프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상언격쟁을 통해 3,500건의 민원을 해결했고, 평균 3일 만에 처리했습니다. 한 백성이 일곱 번이나 가마를 세웠는데도 처벌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조 3년 기록을 보면 "이번 상언은 대부분 먼 지방 사람들이어서 격식을 어기기도 하였을 것이나, 이런 이유로 절차를 어겼다고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한 것이죠.

정조의 죽음과 세도정치의 시작

정조는 1800년 등창(등에 난 종기)이 악화되어 49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 인삼탕을 올렸는데, 정조는 열이 많은 체질이라 인삼은 상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신하들이 인삼탕을 올렸고, 정조는 "인삼 다섯 돈이냐, 세 돈이냐"고 물은 뒤 숨을 거뒀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조를 본 사람이 정순왕후였다는 점에서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66세에 맞이한 15세의 왕비로, 노론 벽파와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정조 사후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4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조의 정책을 대부분 폐기했습니다. 화성은 폐허가 됐고,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학자들은 귀양을 가거나 처형됐습니다. 일부에서는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로 보입니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60년간은 세도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세도정치란 왕의 나이가 어려 외척(왕비의 친인척)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를 뜻합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매관매직(관직을 돈을 받고 파는 것)으로 부를 축적하고, 탐관오리가 백성을 수탈하면서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습니다. 1862년 임술농민봉기는 진주에서 시작해 함흥과 제주까지 번졌습니다.

정조를 통해 무엇이 진정한 정치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세종이 한글로 소통의 길을 열었다면, 정조는 경제와 행정으로 백성의 삶을 바꿨습니다. 리더란 국민의 이야기를 듣고, 고충을 해결하며, 기회를 평등하게 나누는 사람이 아닐까요. 수원화성을 걸으며 "나도 배가 고프고 백성이 배가 부르면 나도 배가 부르다"던 정조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오늘날 리더들도 이 한 문장만 기억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kWkp9OycZw&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