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적 저는 궁금했습니다. 평화롭던 조선이 왜 갑자기 무너졌을까요? 왕이 다스리던 나라가 어떻게 대통령 체제로 바뀐 걸까요? 제 아이와 함께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습니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의 균열과 외부의 압박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붕당정치의 변질과 세도정치
근대(近代)라는 시기는 명확한 조건을 갖춰야 시작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사회적으로는 평등 사상이 퍼지며, 문화적으로는 대중문화가 숨 쉬기 시작해야 합니다. 조선 후기는 경제적 조건은 충족했지만, 정치가 문제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사관에서는 이 시기를 '당파싸움' '당쟁'이라 표현했지만, 정확한 용어는 '붕당정치의 변질'입니다. 붕당정치(朋黨政治)란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정책을 논의하는 제도를 뜻하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것이 백성의 안위는 무시한 채 당리당략만을 위한 싸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저도 아이에게 이 부분을 설명할 때 "원래는 좋은 제도였는데 사람들이 잘못 사용했다"고 쉽게 풀어줬습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11살), 헌종(8살), 철종(19살, 나무꾼 출신)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왕들이 통치하다 보니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이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이를 세도정치(勢道政治)라 부르는데, '세력 있는 집안이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이들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서세동점과 내우외환
밖에서는 더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는 움직임을 말하는데, 18세기 말 산업혁명을 일으킨 서양 국가들이 증기선과 대포를 앞세워 동아시아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해상 무역을 했지만, 조선 500년 동안은 중국과만 교류하며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국이 서양 세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으로는 세도정치로 백성이 고통받고, 밖으로는 서양 세력의 위협이 커지는 상황. 이를 네 글자로 표현하면 내우외환(內憂外患)입니다. 제 경험상 이 단어만큼 조선 후기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표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편전쟁과 청나라의 몰락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제국주의(帝國主義)란 무력을 사용해 다른 나라를 경제적·정치적 식민지로 만들면서 자국의 힘을 키우는 사상을 말하는데, 일본은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말로 침략주의, 팽창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청나라는 1, 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영국은 청나라에 면제품을 팔고 차를 수입했는데, 무역 적자가 심해지자 비겁한 방법을 썼습니다. 식민지 인도에서 양귀비꽃으로 만든 아편을 청나라에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아이도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대 나라를 약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나쁜 물건을 퍼뜨렸다니 너무하다"며 화를 냈습니다.
아편(阿片)은 마약의 일종으로,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희대의 미녀 양귀비의 이름을 붙여 양귀비꽃이라 불렀습니다. 청나라는 아편 수입을 막으려 했지만, 영국은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2차 아편전쟁에서는 베이징까지 점령당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은 1차 아편전쟁에는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수도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500년 동안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어왔는데, 그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서태후의 사치와 청나라의 멸망
청나라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의 부패가 그 기회를 막았습니다. 서태후(西太后)라는 황제의 어머니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서태후의 사치였습니다.
서태후의 한 끼 식사는 농민 한 사람의 1년치 식량과 맞먹었고,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800만 원에 달했습니다. 반찬만 128가지였다고 합니다. 버선을 만드는 데 3천 명이 동원되었고, 온몸을 비취(翡翠)라는 보석으로 치장했습니다.
베이징의 이화원(頤和園)은 서태후의 개인 별장입니다. 멀쩡한 땅을 파서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흙으로 옆에 산을 쌓았습니다. 이 별장을 만드는 데 청나라 해군 1년 국방예산의 절반이 들어갔습니다. 제 아이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건 정말 책임 없는 행동이다"라며 분개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서태후의 사치와 부패가 청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합니다. 다음은 서태후의 사치 규모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 한 끼 식사 반찬 128가지, 현재 가치 800만 원
- 버선 제작에 3천 명 동원, 한 번 신은 버선은 재사용 안 함
- 이화원 건설 비용: 청나라 해군 1년 국방예산의 절반
- 전신을 비취 보석으로 치장, 비취로 만든 가구 사용
결국 이런 지도층의 부패 때문에 거대한 청나라는 조그만 일본에게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국방예산을 개인 별장에 쏟아붓고, 백성은 방치한 나라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내우외환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내부가 든든하고 결속력이 있다면 외부의 공격에도 버틸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는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붕당정치의 변질로 정치는 무너졌고, 세도정치로 백성은 고통받았으며, 서양 세력의 압박은 점점 거세졌습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이 시기를 공부하면서 '내부가 무너지면 아무리 큰 건물도 쉽게 무너진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를 계기로 근대사회는 또 다른 면모를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늘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왔으니까요.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X8PILLanBY&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