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명성황후와 대원군 (왕권 강화, 경복궁 중건, 정치적 갈등)

by roiree11 2026. 3. 23.

명성황후와 대원군 (왕권 강화, 경복궁 중건, 정치적 갈등)
명성황후와 대원군 (왕권 강화, 경복궁 중건, 정치적 갈등)

 

몇 해 전 신랑과 함께 명성황후 뮤지컬을 보고 나왔을 때, 제 머릿속엔 한 가지 장면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15세 소녀로 궁에 들어온 명성황후가 점점 강인한 정치인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시대의 격동도 있었지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복잡한 관계도 큰 몫을 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조선 후기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한 대원군의 개혁 정치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시 조선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대원군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서원 철폐라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전국에 647개나 되던 서원을 단 4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한 것입니다. 서원(書院)이란 조선시대 사림들의 교육기관이자 정치적 근거지를 뜻하는데, 당시엔 이곳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노비를 부리는 등 폐단이 심했습니다. 제가 역사책에서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정말 대담한 개혁가였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득권 세력의 밥줄을 한 번에 끊어버린 셈이니까요.

대원군은 또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라는 법전을 편찬해 흩어진 법령을 하나로 묶었고, 삼정의 문란(三政의 문란) 문제도 손봤습니다. 삼정이란 토지세인 전정, 군역제도인 군정, 환곡제도인 환정을 일컫는 말로, 이 세 가지 조세제도가 부패로 얼룩져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분명 백성을 위한 정치였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의 정책에 지지를 보냈다고 합니다(출처: 국가기록원).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의 실패

하지만 대원군에게도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복궁 중건 사업이었습니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지은 법궁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270여 년간 방치돼 있었습니다.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지냈고,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 있었죠.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면 법궁을 재건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취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정상적인 방법으론 공사비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이 선택한 방법이 당백전(當百錢) 발행이었습니다.

당백전이란 기존 동전인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지닌 고액 화폐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정부가 임의로 돈의 가치를 100배로 책정해서 찍어낸 겁니다. 저도 처음엔 '아, 그냥 돈을 더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시중에 돈이 갑자기 많아지면 화폐 가치가 폭락합니다
  2.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물가가 급등하게 됩니다
  3. 결국 백성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당백전 발행 후 조선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시달렸습니다. 쌀 한 말 가격이 몇 배로 뛰고, 서민들은 먹고살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경복궁은 완성됐지만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결국 대원군은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왜 철의 여인이 되었나

명성황후 민씨가 중전으로 간택된 건 대원군의 계산이었습니다. 민씨 집안은 원래 명문가였지만 당시엔 몰락한 상태였고, 명성황후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손에 자란 처지였습니다. 대원군은 '이 아이라면 외척 세력을 만들지 못하겠지'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오판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한문에 능통했고, 사서삼경은 물론 병서까지 독파한 천재였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녀의 아이큐가 250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정치적 감각이 있었습니다.

제가 뮤지컬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강한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15세에 궁에 들어온 그녀는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와의 갈등, 아이를 잃는 슬픔,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점점 단단해져 갔습니다. 특히 대원군이 명성황후가 낳은 아이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잃게 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한 번은 명성황후가 낳은 아이가 항문이 막힌 채 태어났는데, 당시 서양 의술로는 간단한 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세자가 될 아이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며 산삼만 내려줬고, 결국 아이는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원군은 며느리를 위로하기는커녕 다른 후궁들에게 "네가 우리 아들 애 좀 낳아줘"라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저라도 시아버지를 용서 못 했을 겁니다.

정치적 라이벌이 된 시아버지와 며느리

명성황후가 중전이 된 후 전국의 민씨 일가가 서울로 몰려들었습니다. 대원군이 그토록 경계했던 외척 세력이 형성된 겁니다. 명성황후는 점차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특히 외교 문제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 열강의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 전략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원군과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수하며 외세를 배척했지만,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등용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쇄국정책이란 외국과의 교류를 끊고 나라의 문을 닫는 정책을 뜻하는데,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지는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명성황후는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대원군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민씨 일가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새로운 부패가 생겨났고, 이는 결국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은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명성황후가 나라를 지키려 했던 건 분명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는 일본 자객들에게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며 끝까지 저항했다고 전해집니다. 제가 뮤지컬을 보고 나서 며칠 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서 조선은 결국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마지막까지 보여준 조국애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날 이후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고, 그들 나름의 고민과 아픔이 있었다는 걸 느꼈으니까요.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ETOm4W7uGM&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