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와 국립중앙박물관을 돌아보던 중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엄마, 발해는 중국 역사 아니에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분명 학창 시절 남북국시대라고 배웠는데, 요즘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발해 왕들이 직접 남긴 기록을 찾아보자고 제안했고, 함께 자료를 살펴보며 왜 발해가 우리 역사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고구려 계승을 명시한 발해의 정체성
발해가 우리 역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발해 왕들이 직접 남긴 국서(國書), 즉 외교 문서입니다. 국서란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에 보내는 공식 외교 서한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그 나라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발해 문왕의 국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땅은 고구려의 옛 땅이요,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으니 너희는 우리 발해를 옛 고구려 대하듯 하라." 단순히 한두 번 언급한 게 아닙니다. 2대 무왕과 3대 문왕이 일본과 당나라에 보낸 여러 국서에서 반복적으로 "저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왕"이라고 명시했습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제가 박물관에서 아이에게 이 부분을 설명했을 때, 아이는 "그럼 발해 왕이 직접 우리 조상이라고 말한 거네요"라고 이해하더군요.
일부에서는 발해 인구의 대다수가 말갈족이었으니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건 숫자가 아니라 지배층의 성격입니다. 중세 봉건 시대에는 왕과 귀족 계층이 나라의 방향과 문화를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였지만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고, 그들이 세운 국가 체제와 문화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처럼 국민이 주인인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온돌 문화로 증명되는 우리 민족의 흔적
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온돌입니다. 온돌이 뭐냐고요? 요즘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제 어릴 적 할머니 댁에는 아직 전통 온돌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뜨거운 연기가 방바닥 아래 구들장을 데우고, 그 열기로 방 전체가 따뜻해지는 난방 시스템입니다. 이 온돌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우리 민족만이 사용한 독특한 주거 문화였습니다.
온돌의 구조를 보면 정말 과학적입니다.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열기가 구들(방바닥 아래 공간)을 통과해 굴뚝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열의 대류 현상을 이용해 방바닥을 데웁니다. 아궁이에 가까운 쪽은 아랫목, 먼 쪽은 윗목이라고 부르는데 재미있는 건 구들장의 두께입니다. 아랫목 구들장은 두껍고 윗목 구들장은 얇게 만들어서 열이 고르게 분산되도록 설계했습니다. 게다가 굴뚝 앞쪽 바닥을 푹 파놓아 빗물이 역류하지 않도록 한 점까지,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발명품입니다.
그런데 이 온돌이 발해 유적지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고구려 온돌과 동일한 형태의 온돌 구조가 발해 건물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온돌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발해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우리 온돌을 체험한 뒤 바닥 난방 시스템 개발에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은 온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추진 중인데, 중국이 자국의 캉(火炕) 문화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먼저 체계적인 자료를 정리해서 등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온돌은 전 세계에서 한국을 포함한 극소수 지역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난방 방식입니다.
- 발해 유적지에서 고구려와 동일한 형태의 온돌이 발굴되었습니다.
- 온돌 외에도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기와 무늬와 무덤 양식이 발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통일신라 쇠퇴와 새로운 시대의 열망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 한반도 남쪽에서는 통일신라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통일신라 하대(下代)에 이르자 왕실과 귀족들이 타락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특히 진성여왕 시기에는 정치가 완전히 문란해졌는데, 진성여왕은 측근 남성들을 높은 관직에 앉히고 그들이 백성을 수탈하도록 방치했습니다. 결국 전국 곳곳에서 농민 반란, 즉 적들의 난(赤巾의 亂)이 일어났습니다. 적들의 난이란 민초(民草), 즉 풀뿌리 백성들이 일으킨 반란을 뜻하는데, 이들이 점차 세력을 키워 지방 호족(豪族)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혼란한 시기에 중국에서 돌아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최치원입니다. 최치원은 육두품(六頭品) 출신으로, 신라의 골품제(骨品制) 아래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골품제란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관직 진출이 결정되는 신라의 신분제도를 말합니다.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賓貢科)라는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에 합격했는데, 평균 합격 연령이 40세 가까이 되는 고난도 시험을 이 나이에 통과한 천재였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며 큰 공을 세웠고, 황제로부터 높은 벼슬과 부귀영화를 제안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조국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박물관에서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며 "최치원 선생은 일제강점기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처럼 나라를 지키려 했던 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총으로, 윤봉길 의사가 폭탄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다면, 최치원은 자신의 지식과 정치적 능력으로 신라를 살리려 했던 것입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時務十條)라는 개혁안을 올렸습니다. 시무 10조란 당시 시급한 정치 문제 열 가지를 정리해 해결 방안을 제시한 정책 건의서입니다. 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좌절한 최치원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산속으로 은거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육두품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선배조차 신라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목격한 것입니다. 결국 육두품 출신 학자들과 선종(禪宗) 불교 승려들, 그리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되었고, 이들이 훗날 고려 건국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발해와 통일신라의 역사를 아이와 함께 공부하면서 저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체성과 선택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발해 왕들이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자라 당당히 밝혔고, 온돌이라는 우리 고유 문화를 이어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명백한 증거입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되,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힘이 아닐까요.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kfytsy8M8s&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