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학교에서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배워와 집에서 계속 부르던 어느 날, 문득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무겁고 아픈 역사지만, 그 속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삼일운동 이후 본격화된 독립운동, 특히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활약은 단순히 역사책 속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밑거름이었다는 것을 아이와 함께 되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일본에 맞섰을까?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 우리 민족은 결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이회영을 비롯한 육형제가 서울에서 물려받은 재산 600억 원을 모두 팔아 만주 서간도에 독립군 양성소를 세웠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0년 동안 이 거금을 전부 독립군 교육에 쏟아부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1920년대 독립전쟁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2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평민 출신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 그리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이 대표적입니다. 청산리 대첩은 사실 대군평전투, 천수평전투, 고동하전투, 어랑촌전투 등 일주일간 벌어진 여러 전투를 통칭하는 말입니다(출처: 독립기념관). 인력과 무기 면에서 열세였음에도 뛰어난 전술로 일본군 3,300명을 전사시킨 이 전투는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육형제의 결단 없이,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들의 헌신 없이 그 승리는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의열단과 김원봉, 그들은 왜 두려운 존재였을까?
1920년대 독립운동은 크게 독립전쟁과 의거(義擧) 활동으로 나뉩니다. 의거란 '의로운 일을 맹렬히 추진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이를 전문적으로 수행했던 단체가 바로 의열단입니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당시 일본 경찰이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국내에 침투시킨 나석주, 최수봉, 김상옥 등의 단원들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종로경찰서, 부산경찰서 등 일제의 핵심 기관에 폭탄을 던지며 저항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김원봉에 대한 일제의 현상금이 100만 원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3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의열단 단원이 국내로 잠입했다는 정보만 들려도 전국의 일본 경찰이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이는 의열단의 활동이 얼마나 일제에게 위협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솔직히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저도 놀랐던 것은, 의열단이 단순한 무장 투쟁 집단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전략을 가진 조직이었다는 점입니다. 적의 급소를 정확히 타격하는 방식은 현대의 게릴라전과도 유사한 면이 있었습니다. 아이에게도 '용기만으로는 부족하고, 지혜와 계획이 함께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산, 시계 하나가 말해주는 것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 의거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선생이 1931년 조직한 한인애국단입니다. 한인애국단이 배출한 두 영웅이 바로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입니다. 여기서 잠깐, '의사(義士)'와 '열사(烈士)'의 차이를 아시나요? 손에 무기를 들고 뜻을 외치면 의사, 무기 없이 유관순 열사처럼 태극기를 들고 저항하면 열사라고 부릅니다. 살아 있는 분들은 지사(志士)라고 하고요. 그러니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애국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모두 지사인 셈입니다.
이봉창 의사는 도쿄 사쿠라다문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고,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고위 장성들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개인이 벌인 행동 중 일제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출처: 국가보훈부). 그날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들을 '병사'라고 부르며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 "너희도 만약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의 깃발을 높이 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 "아버지 없는 것 슬퍼하지 마라. 어머니 교육만으로도 성공한 이들이 동서양에 많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바라건대 여보, 꼭 좋은 엄마가 되어주오. 두 아들 멋진 위인이 되게 해주오"라고 남겼습니다.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죽음을 택해야 할 단 한 번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그의 말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의거를 앞두고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와 윤봉길 의사의 새 시계를 바꿔 찼다는 일화 말이죠. "제 시계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좋은 시계 차고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김구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우리 다음 세상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그 두 시계는 70년이 지난 뒤 백범기념관에서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자손들은 편지 한 장과 낡은 시계 하나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친일파 이완용이 물려준 천금만금보다 훨씬 더 값지고 뛰어난 유산이 아니었을까요? 이완용의 후손들은 할아버지 때문에 평생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자랑스러운 이름을 물려받았으니까요.
광복은 단순히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땀과 정신이 깃든 역사입니다. 저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대단함을 칭송하기 이전에 그들이 가졌던 나라에 대한 열망과 간절함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올바른 리더를 뽑는 일, 환경을 사랑하는 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모두 애국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힘이 모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h48Eo-MojY&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