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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팔미도등대)

by roiree11 2026. 6. 1.

인천상륙작전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팔미도등대)
인천상륙작전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팔미도등대)

 

인천상륙작전 하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십니까? 열에 아홉은 맥아더 장군이라고 답하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물어왔을 때, 책을 같이 찾아 읽고 영화까지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이 작전에는 맥아더 장군보다 더 먼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다는 것을.

장사상륙작전, 페이크였지만 목숨은 진짜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단 나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동쪽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면전 대신 적의 허를 찌르는 우회 상륙작전을 구상했고, 그 목표지점은 인천이었습니다. 서울과 불과 34km 거리였고, 보급로 차단이라는 전략적 이점도 컸습니다.

그런데 인천 상륙을 성공시키려면 사전에 적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사용된 전술이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입니다. 성동격서란 동쪽에서 소리를 내어 적의 주의를 끌고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전략으로, 손자병법에서 비롯된 군사 기만술입니다. 맥아더는 남포, 해주, 군산, 원산 등 여러 지점에 상륙하는 척 거짓 무전을 적에게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 페이크 작전을 실제로 수행한 것이 장사상륙작전입니다. 총을 잡아본 지 보름도 채 안 된 772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낡은 선박 문산호에 올라탔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10대 소년들이 총 훈련 보름 만에 실전 투입이라니요. 그것도 태풍을 뚫고요. 그들은 폭풍 속에서 헤엄쳐 육지에 올라 포항·영천 방면 북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식량과 탄약은 단 3일치뿐이었습니다. 구조선이 출발했지만 대부분의 학도병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분들은 "결과적으로 희생을 강요한 작전이었다"고 보시기도 합니다. 저도 그 시각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선 10대 소년들의 선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그 나이에 이미 자신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학도병이라는 이름 앞에서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학도병(學徒兵)이란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학생 신분으로 전투에 자원 참전한 이들을 말합니다. 6.25전쟁 당시 전국에서 약 2만 7천 명의 학도병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772명은 그 안에서도 가장 어린 층에 속했습니다. 딸아이와 함께 관련 책을 읽으면서 저는 한 가지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나이 아이들이라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딸아이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소년들도 답을 알아서 간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냥 지금 누군가 나서야 한다는 걸 알았던 거겠지요.

학도병들의 용기를 단지 "순수한 애국심"으로만 정리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 더 복합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용기, 두려움,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 그리고 열여덟 살의 결단. 그것이 한데 엉켜서 총을 든 것이라고요.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학도병 참전과 관련한 공식 기록 및 현황은 국가보훈부 공식 누리집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분들의 희생이 단순히 역사 교과서 한 줄로 남지 않으려면, 우리가 직접 찾아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조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동격서 전술로 적의 시선을 분산시킨 거짓 무전 작전
  2. 장사상륙작전을 통한 동해안 페이크 상륙 및 북한군 북상 저지
  3. 해군 첩보부대의 인천 잠입으로 해안포 위치·기뢰 위치 파악
  4. 켈로(KLO) 부대의 팔미도 등대 점령과 함대 유도 신호 송출
  5. 9월 15일 밀물 시간대의 두 시간에 모든 것을 건 상륙 감행

팔미도 등대의 불빛이 전쟁의 결과를 바꿨습니다

팔미도 등대(八尾島 燈臺)는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에 세워진 등대입니다. 이 등대는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로, 1903년에 처음 불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상륙작전 성공의 또 다른 열쇠는 엑스레이(X-RAY) 작전이었습니다. 엑스레이 작전이란 상륙 본대가 들어오기 전에 첩보부대를 적진에 미리 투입해 적의 방어 정보를 수집하고 무력화하는 선제 침투 작전입니다. 이때 해군 첩보부대가 인천 일대에 잠입해 해안포 위치, 병력 규모, 기뢰(機雷) 배치 정보를 파악했습니다. 기뢰란 수면이나 수중에 부설해 함선이 접촉하면 폭발하는 수중 폭발물로, 좁은 수로에서는 특히 치명적입니다. 그리고 켈로(KLO, Korea Liaison Office) 부대가 팔미도 섬에 상륙해 적과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했습니다. 상륙 당일인 9월 15일 자정, 그 등대에서 불빛이 켜졌습니다. 조수간만의 차(潮水干滿의 差), 즉 밀물과 썰물의 수위 차이가 세계 5대 갯벌 수준인 인천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단 두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맥아더 함대는 그 불빛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팔미도 등대의 불빛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전쟁의 방향을 바꾼 빛이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멈췄던 것은 수치였습니다.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5,000분의 1로 계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오히려 그 낮은 확률을 이유로 인천을 고집했습니다. 적이 가장 방심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요.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고,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고, 국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까지 북진했습니다. 팔미도 등대의 역사적 의미와 현황은 해양경찰청 공식 누리집에서도 일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팔미도는 인천시 관할 관광지로, 등대 원형이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딸아이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가 나눈 마지막 이야기는 포항 탑산 이야기였습니다. 경북 포항시 용흥동 탑산에 학도병 위령탑이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포항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들르자고 약속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만 기억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제 그렇게만 보기 어렵습니다. 그 작전 뒤에는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간 10대 소년들과, 등대 불빛 하나를 켜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