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와 함께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조선 말기만큼 복잡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교과서에서는 개항 이후 근대화 과정으로 간단히 설명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이 시기는 정권 교체, 군란, 정변이 연달아 터지며 나라 전체가 흔들렸던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엔 단순히 '개항=발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료를 찾아보고 아이와 토론하면서 이 시기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흥선대원군에서 명성황후로, 권력 교체의 의미
흥선대원군은 1863년 겨울부터 약 10년간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왕권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고, 기득권 세력을 정리하려면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했습니다. 제 생각에도 대원군의 강경책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가 1873년 실권에서 물러나고 명성황후(당시엔 왕비)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잡으면서 정책 기조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대원군 때문에 생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그는 정확히 10년 만에 실각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문을 굳게 닫았다면 며느리는 문을 활짝 연 셈이죠. 1876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위협하자, 명성황후 정권은 결국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개항이 늦어서 나라가 망한 거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조약 내용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겉으로는 평등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조약 1관에서 '조선은 자주국'이라고 명시한 건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압박이었고, 2관에서 일본이 조선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다고 한 건 사실상 침략 준비였습니다. 특히 치외법권(治外法權) 조항은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법으로 처리한다는 내용으로, 현재 주한미군이 갖고 있는 특권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직접 조약 원문을 찾아보고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이건 개항이 아니라 문호 개방을 빌미로 한 주권 침해구나' 싶었습니다.
임오군란, 공무원이 난을 일으킨 이유
1882년 여름, 조선 구식 군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고 하는데, 군란이란 군인들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당시 조선군은 13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제 경험상 조직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인데, 공무원인 군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건 이미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당시 명성황후 정권은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 부대를 만들어 일본식 훈련을 시키고 좋은 무기와 보너스를 지급했습니다. 반면 기존 5개 부대 중 3개를 해체해 수많은 군인을 실업자로 만들었고, 남은 군인들에게도 월급을 주지 않았습니다. 겨우 받은 월급 쌀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건 정책 실패를 넘어 통치 포기 수준이구나' 싶었습니다.
임오군란의 핵심 문제는 단순히 군인들의 봉급 체불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국내 질서조차 유지할 능력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고, 결국 청나라가 3천 명의 군대를 보내 난을 평정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국제사회에 '내부 통제력을 상실한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이 시기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이 급격히 강화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갑신정변, 젊은 개혁파의 3일 천하
임오군란 2년 뒤인 1884년, 이번엔 젊은 관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하는데, 정변이란 폭력을 동반한 정권 교체 시도를 의미합니다. 주도자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개화파 관료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들을 '진보적 개혁가'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방법론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민씨 일족을 살해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납치했습니다. 우정국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우체국을 뜻하는데, 그 개국식을 정변의 무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계획적 범죄였습니다. 인근 민가에 불을 지르고 민씨 관료들이 나오자 칼로 살해한 뒤,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왕을 감금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개혁의 명분이 있었다 해도 이건 명백한 반역이구나' 싶었습니다.
갑신정변의 핵심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외세 의존: 일본과 사전 결탁해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자주적 개혁이 아닌 친일 쿠데타의 성격을 띱니다.
- 폭력적 방법: 정적을 토론이 아닌 암살로 제거했으며, 왕을 납치해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 현실 오판: 청나라의 군사 개입을 예상하지 못했고, 일본군이 쉽게 후퇴하자 3일 만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아이와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목표가 좋다고 수단까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더욱 혼란에 빠졌고,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강화되었습니다. 개혁의 방향은 옳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의 실패로 오히려 나라를 더 위험하게 만든 사례였습니다.
제가 이 시기를 공부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조선이 결정적 순간마다 최악의 선택을 반복했다는 사실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은 필요했지만 시대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고, 명성황후의 개항은 방향은 맞았지만 졸속과 부패로 얼룩졌습니다. 임오군란은 통치 능력의 붕괴를, 갑신정변은 개혁 방법론의 실패를 보여준 사건이었죠. 역사를 공부하면서 중요한 건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권력의 책임', '개혁의 방법', '자주성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jDVuS_LL5Y8&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