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에게 "엄마 할아버지가 바로 태조 이성계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을 때, 초등학교 6학년 자녀의 눈이 반짝였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집안이 전주이씨라는 사실이 역사 공부를 시작하는 데 의외로 큰 동기가 됐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단순히 역사책 속 인물이 아니라, 고려 말 혼란기를 온몸으로 겪고 결단을 내려야 했던 한 명의 무장이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꿨고, 그 과정에서 권력이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고려 말 혼란과 위화도 회군의 배경
1388년, 압록강 위화도에서 벌어진 회군(回軍)은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회군이란 출정한 군대가 원래 목적지로 가지 않고 방향을 돌려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 고려는 80년간 원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등장하는 이른바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를 맞이했습니다. 원명교체기란 중국 대륙에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무너지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들어서는 격변의 시기를 말합니다.
고려 내부에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는 친원 세력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은 권력 있는 문벌과 세력 있는 족속을 합친 말로, 이들은 경제적으로 거대한 대농장을 소유하며 산맥과 하천으로 자신의 땅 경계를 표시할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구하지 못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시체가 즐비했던 시대였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아이에게 설명할 때, "그때는 땅이 곧 돈이었고, 땅 없는 사람은 살아갈 방법이 거의 없었어"라고 했더니 비로소 당시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더군요.
공민왕은 이런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자주적인 고려를 만들기 위해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를 등용했습니다. 신진 사대부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관직에 오른 지방 출신 중소 지주의 자제들로, 정몽주와 정도전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사랑하던 노국대장 공주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정치적 의욕을 잃었고, 결국 측근의 배신으로 시해당합니다. 신진 사대부는 정치적 조력자를 잃은 셈이었습니다.
-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 독점으로 백성 생활 극도로 악화
-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과 신진 사대부 등용
- 공민왕 시해 이후 신진 사대부의 새로운 무인 세력 모색
이성계의 결단,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리다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 무장으로, 본관은 전주이씨입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전주에서 관기와 사랑에 빠져 도망쳐 함경도까지 간 뒤 그곳에서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이성계는 공민왕 시절부터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히는 데 공을 세우며 동북면의 실력자로 떠올랐습니다. 정도전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정치적 배경이 약하고 글을 잘 모르는 '함경도 촌놈'이지만 싸움만큼은 최고인 이성계를 내세워, 자신은 뒤에서 조정을 움직이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1388년,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최영 장군은 즉시 요동 정벌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우왕은 어렸고, 최영은 권문세족 출신이었지만 금보기를 돌같이 하는 청렴한 인물이었습니다. 최영은 이성계를 믿고 군사 5만을 맡겨 출정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출정 전부터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이를 사불가론(四不可論)이라 하는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소역대불가), 여름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하월불가), 장마철 전쟁(우월불가), 남쪽 왜구 침입 중 북쪽 출병(외구불가)이 그 내용입니다.
압록강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난 이성계는 다시 개경으로 철군 허가를 요청했지만, 최영은 편지를 찢어버렸습니다. 이성계는 군사들을 모아놓고 선택을 제시했습니다. "강을 건너 죽을 것인가, 아니면 말머리를 돌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인가." 군사들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고, 이성계는 개경으로 회군해 최영을 붙잡았습니다. 제가 직접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성계의 결단이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현실 판단에 기반한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을 키워준 최영을 배신한 것은 분명하지만요.
조선 건국과 권력의 본질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정도전은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키고, 고려 왕족 중 가장 만만한 공양왕을 옹립했습니다. 이들은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을 내세웠는데, 이는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통해 정통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공양왕은 4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최영 장군은 위화도 회군 직후 붙잡혀 사형당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내가 죄가 있으면 무덤에 풀이 나고, 억울하게 죽으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성계 측은 최영 무덤에 인위적으로 풀을 심고 물을 주었지만, 심는 족족 풀이 말라 죽어 결국 적분(赤墳), 즉 붉은 무덤으로 불렸습니다. 반면 이성계의 무덤은 함경도 흙을 덮고 억센 풀을 심었는데, 이는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에게 형제들을 잃고 죽을 때까지 방치당한 채 "나를 함경도로 보내달라"고 유언했기 때문입니다(출처: 문화재청). 권력이란 결국 이렇게 냉혹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역사는 단순히 연도와 왕 이름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성계가 태조가 된 과정은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혼란한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한 무장의 치열한 선택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문으로, 이성계는 무로, 서로를 이용하며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조선 건국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도 던지는 질문이 많습니다. 권력을 위해 은인을 배신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명분과 실리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그리고 한 사람의 결단이 역사를 어떻게 바꾸는가. 위화도 회군은 바로 그 질문의 출발점입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선택과 고뇌를 읽어내는 것이 진짜 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도 이제는 태조 이성계를 단순히 조선을 세운 왕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결단을 내린 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roPMl8M7Zs&list=PL-uq0qSBqF1vrg-3gK0NeZ6l0lyd-ZJcc&index=4